바다, 그 끊이지 않는 몸짓
- 짙푸른 생(生)의 숭고한 빛들 -

소설가, 시인   박 정혜

푸른 그리움 덩이들.
진양조로 시작했다가 급기야는 중중모리에서 휘모리로 세차게 휘도는 푸른 그것들.
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쇠 달구듯 그리움을 자근자근 녹이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움은 그 깊이만큼 갖춰진 주형틀을 따라 이름 붙여지곤 했다. 그리움은 해원(海源)이거나 수향(水鄕)이거나 항(港)이기도 했다.

그리움에서는 잊지 못 할 향기가 난다.
 몰캉하게 코를 찌르는 갯내는 말할 것도 없고, 머나먼 곳으로 가보자며 보채는 바다 물결 냄새. 그리고 살풋 머리를 기댄 채 잠든 배를 재우는 포구의 품 냄새가 기억을 간질인다. 그런가하면 그리움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으로 난 자드락 길 냄새 같기도 하고, 유채 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조각구름 향기를 품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그리움은 한없이 비상(飛上) 중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움의 귀착(着)지는 바다이다.

바다는 그-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다. 그리움의 향기를 길어 올리는 어부다-의 고향이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훌쩍 바다 곁으로 갈 수 있긴 할 테지만, 유독 줄기차게 바다를 그려대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환경으로, 그리운 감정의 대상물로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바다는, 슬픔의 발원지이자 위로의 발산지 이기도 하며, 유년의 소중하고 따스한 기억 속에서 늘 남실거리며 향수를 불러오는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통영 앞 바다 풍광의 이미저리(imagery)를 그대로 그려오던 어느 날을 지나서.
바다를 가로질러 난 낡은 나무다리의 이음새, 어쩔 수 없는 틈으로 억눌린 꿈을 한껏 부풀게 하는 짭짤한 바다 바람이 등짝에 바짝 기댄 채 불어온다. 다리를 건너다 말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맑은 눈을 갖다 대노라면 독특한 추억의 구멍으로 찬란한 비밀 이야기를 소근거려 주는 바다. 그렇게 바다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바다가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조렸던 그.
 그러다가 어느 사이엔가 바다와 조분조분 대화를 나누던 그. 그와 바다 사이의 빛나는 대화들은 여울이 진 구상형식으로 그리움의 부호가 되어 아로새겨 지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바다를 항해 중이던 그는, 바다 물결을 꿈틀대던 섬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98년의 나무에 새겨진 바다는 불꽃으로 화하는 중이었다. 빛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 날개를 달고 마음대로 선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대로 쏟아지려다 말고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영영 꺼지지 않는 기운으로 화하기도 했다. 물결들은 눈부신 기운으로 파들파들 날아올라 화라락 불타올랐으며, 그렇게 그 불꽃들은 마하 수 마일의 속도로 함부로 가슴을 파고들기도 했음에랴.

 <Vigor>, <Nocturne in my being>, <The energy in my life-I>라는 팻말이 붙은 섬광들은 <바다>라는 말이 없어도 <바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상 바다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의 향기를 길어 올리는 어부인 그가 이뤄낸 아로새김 때문이다.

바다, 물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세세히 기억을 해내는 물의 결정체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늘상 바다는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 너른 품속에서는 작열하는 생명의 원천이 콸콸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물의 파동들은 온 몸을 숙이고 펴고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끊임없는 파도의 연동 운동으로 바다는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그 형형색색의 불꽃 속에서 서서히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 혼돈들은 일정한 부피로 자라나 파열 직전까지 팽창해질 대로 부풀어 오르면서 들리지 않는 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혼돈들은 꿈을 잉태하곤 했다. 꿈들은 정제되고 차분하게 응축된 힘으로 타닥타닥 타올랐으며, 그 속으로 파고드는 생명들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2001년, 드디어 그는 바다풍광 안으로 뛰어든다.
바다는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불어 넣어주며 바다 안으로 그를 들여놓고 있다. 한결같은 숭고한 유혹. 이제부터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 헤엄치는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다. <물고기>라 이름 붙여도 좋을 그 <작열하는 꿈>들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제각각 다른 자태로 비늘을 반짝거리며 부지런히 생의 지느러미를 움찔대고 있다.
 그들은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퍼스나(persona)를 가만히 음미해보자.
 빠르거나 느린 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전체를 아우르는 기조는 원초성이다. 장식 이전의 장식. 분열 이전의 분열. 조화 이전의 조화이다. 그 들끓는 우주적 에너지를 양껏 품고 있으면서도 다분히 서정적인데서 기묘한 감탄사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음에랴.
 그리하여 그 타오르는 듯한 그림들은 리리시즘(lyricism)적 프리미티브(primitive)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내밀하게 웅크려 있다가 서서히 펼쳐대는 움직임, 마치 비상 직전의 날개를 감지할 수 있다. 그 차오르는 아우라(aura)는 급기야 날아오르게 되고, 우리의 눈 걸음들도 함께 비상하고야 만다. 짐작하다시피 충만 되어 오는 비상의 끝자락은 그리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움을 낚는 그는, 바다의 손짓에 마냥 빠져 들어가 헤엄치고 몸부림치며 바다를 누비곤 했다. <생>연작의 여러 작품들은 오랫동안 바다와 대화를 주고받던 그에게 내린 바다의 선물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바다가 그 엄청난 에너지를 살짝 그에게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포세이돈처럼 바다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역동적인 바다의 노래를 오라토리오(Oratorio)로 부르곤 했다.

그런가하면, 물고기들은 강렬한 색채를 띤 여러 바탕 속에서 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고기들은 팔딱대며 활발한 감정을 풍기고 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비해, 이들 물고기가 제대로 된 바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죄다 흡수하고 있으니 오죽 힘이 넘치랴. 이미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바다를 마음껏 헤치고 있는 그도 더불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불꽃을 제대로 피워 올려 화력이 넘쳐나듯, 물고기가 된 그도, 수많은 물고기의 행렬들도 한없이 타오르는 에너지 안에서 건강하다. 푸른 그리움들은 수축과 이완이 잘 되는 건강한 심장근육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다.

에너지들은 활기차다.
 그렇다고 해서 요란스럽거나 소란을 피워대지는 않는다. 때로는 잔잔한 숲 속, 음이온이 곳곳에 풍겨오는 산 속 같기도 하다. 또 때로는, 흰 작약 꽃이거나 이팝나무 꽃그늘 같기도 하다. 낮은 휘파람 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에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리는 공후인을 타는 오래되고 귀한 여자의 눈물 같기도 하다.
 물고기들은 비슷비슷한 몸뚱아리를 하고 있지만, 표피 안에 흐르는 핏줄들은 사연이 많다. 소진한 시간들을 오롯이 짊어지고 <빛>으로 향하고 있다. <빛>을 받아 또 다시 포들포들 기운을 차린 물고기들은 가야할 길을 향해 떠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한바탕 멍이 들고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일말의 물고기들은 울부짖으며 웅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하면 슬며시 다가가 <빛>을 향해 가자며 쇠약해진 등을 부리로 툭툭 치며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도 있다. 이내 고꾸라지고 말듯 비틀대던 이들은 <빛>을 받자마자 초롱해져서 왔던 길을 신나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빛>은, <에너지>는, <생生>은 <사랑>이다.
 푸른 그리움의 덩이는 바로, 결코 메마르지 않는 <사랑>이다.

목숨을 세우는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은 그리움을 낚아 올리는 그에게는 단연코 <바다>이다. 바다는 고향이전의 고향이다. 먼 길을 떠났다가 산란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 떼들의 귀소본능처럼 <바다>는 <시간의 자궁>이다. 깊숙한 고독을 안고 마침내 침잠하다가 만나게 되는 <빛>이다. 그리하여 <바다>는 충만한 그리움이 빚어내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어릴 적 고향, 통영 바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손등이 거칠게 자주 트곤 했던 겨울. 제법 강단있는 손을 놀려 돌팔매질로 바다를 두드리면 정확히 세 박자로 퉁겨 가다가 바다와 하나가 되던 조약돌. 물수제비를 뜨던 손으로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반가이 손을 뻗치곤 하던 풀꽃 반지 하나로도 거뜬히 행복해했던, 가슴속에 진주들이 주렁이던 그 시절.
 가난하고 빛바랜 걸음으로 고달픈 길을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문득 기운 찬 바다의 맥박 소리를 듣는다. 아무 말 없이 너른 품으로 토닥토닥 안아주다가 크고 강한 입김으로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바다의 손길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푸른 그리움의 덩이.
 생(生)은 파릇파릇한 눈빛으로 고개를 넘고 있는 중이다. 바다의 천 가지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를 만난 물고기들은 깊고 은은한 악수를 건네게 될 것이다. 그는 당신의 차고 막막한 이마 위에 <빛. 사랑>을 찬란하게 부어줄 것이다. 그는 사실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다. 그리움의 향기를 길어 올리는, 바다의 말을 제대로 전해주는 유일한 <큰 어부>이다.

그, 김웅에게서는 소용돌이치며 영원히 각인되고 마는 <우주의 지문>이 세차게 찍히는 소리가 깊고 길게 울러 퍼지곤 한다.

2005. 8. 2 .